에어포켓(20)다음날 표현봉의 전화를 받았다. 출근하기 이른 시간이라 약간 긴장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시간이 좀 그렇지? 출근길에 문방구에서 컴퍼스와 삼각자를 사오겠나? 사둔다 하고 까먹었어. 오늘 실험적인 조각에 도전해볼까 해서, 자네가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그려진 구상은 현실화될 거야.”사실 어젯밤 건너편 주택옥상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 여자의 가위눌림으로 온전하게 잠을 설쳤다. 머리가 아팠고 무엇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귀신을 봤다는 것보다 헛것을 봤다는 쪽으로 위안을 삼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고깔을 쓴다야산(10)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자의 죽음이 마치 원인제공을 한 장본인처럼 느껴져 공황장애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방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지만 민박집 방안은 여자의 숨소리가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뭉텅뭉텅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안에 무엇을 떨쳐내기 위해 휴가의 빌미로 찾아든 만강읍에서 이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뒤척거려 보지만 매끈거리는 알몸과 번개탄 중독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죽음만 확대되어 머릿속을 채울 뿐이었다. 두렵다.불에 덴 듯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거기,
산 자와 죽이려는 자(3)이른 시간을 택해 조남철이 운영하 는 마틸다 클럽으로 찾아갔다. 내가 선호하는 방법은 단순하면서 성공률 이 높았다. 좁은 수로에 뜰채를 받쳐두 고 상류에서 휘젓거나 몰아주면 물고 기는 여지없이 뜰채 안에 모여들었다.어릴 적 강가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그 방법을 인용하여 시시각각으로 죄 여오는 공포를 먼저 선물해주었다. 그 러다 보면 목표물은 자연스럽게 뜰채 안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기 마련이다. 제기불능의 원칙으로 숨통을 끊어 놓으면 고객과 거래는 성 사가 된다. 밤새 헐떡였던 클럽은 해가
사랑(8)공중에 맨 줄은 줄광대의 몸짓에 따라 팽팽 소리치고 있었다. 어릿광대의 능청스러운 이야기와 발림은 끊이지 않고 신명을 더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긴장을 더하게 육잡이들의 악기연주가 비질처럼 바닥을 쓸어가는 가 싶더니, 순간 장구소리가 튀어나오고 줄광대가 줄 위에서 삐끗 했다. 구경꾼들의 머리끝이 쭈뼛 섰다. 줄광대가 허공에서 한 다리로 줄을 감아 추락을 막고 있었다. 어릿광대가 한마디 거들었다.“육시랄 놈, 이제나 저제나 질긴 인연 줄이 끊어질까 이 순간을 기다렸는데 용케도 버티는구나. 대갈통이 먼저 떨어져 이마빡이 작살나버
어차피 먼 길이었다. 지척을 두는 길이 아닌 멀리 보는 한세상이었다. 덧없음으로 굽이쳐 돌아보면 짧게 느껴질지언정 가고자하는 그 길은 나무의 나이처럼 둥글게 새겨졌다. 그래서 아침이 있고 한낮이 있고 무수한 저녁 무렵에 당도하게 되었다. 인생은 척박한 땅에 뿌리내릴 싹 하나 틔우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바람도 이겨내고 눈보라도 견뎌내고 안간힘으로 꽃 한 송이 피울 자신의 흔적을 퍼뜨리고 싶어진다. 적문의 행선(行禪)은 예전 같지 않았다. 휘적휘적 수도승의 발품이 딱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두워질수록 밝아지는 패기가 있었다. 스무 살의
스님께서 말씀하신 이 얘기는 옛날에 있었던 일만이 아니라 요즘도 생기고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늘 변덕스러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처럼 자신의 이익에 따라 달리 변하고 있으니 어리석은 중생이라는 것이겠지요. 그럼, 어떻게해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는지요? ‘인과경’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좋은 벗이란 상대방의 잘못을 보면 일깨워 주고, 좋은 일을 보면 마음 속으로 깊이 기뻐하며, 괴로움에 처했을 때 서로 버리지 않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선 내가 친구에게 이런 마음을 보였는지, 그리고 어려움
사랑(2)새벽예불은 범종소리가 끝나자 명신의 주도로 시작되고 있었다. 적묵당에서 운신의 폭을 접은 적문은 아직도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여인의 알몸이 낙인처럼 표식으로 다가왔다. 염화실은 예불을 주관하는 대덕(大德)이, 적묵당은 우바새가, 설선당은우바이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오고 있었다. 그런 불문율을 적문이 깨뜨린 것이었다. 간드러진 물소리를 들었지만 호기심을 내려놓고 바삐 법당으로 향한 발걸음으로 새벽예불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어느 변명과 핑계를 갖다 부쳐도 납득은커녕 오해를 살만한 빌미를 제공
사랑(1)사월 열아흐레 날. 수도승으로 떠돌던 적문은 명신암에 잠시 들렸다. 산길이 험한 탓도 있지만 정진하지 못한 예불이 마음에 쓰여 바랑을 내려놓았다. 어깻죽지가 비로소 뻐근하게 다가왔다. 사계절을 떠돌다보니 다시 봄 중허리에 닿아있었다.실로 고단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여정에 동행해준 가죽미투리를 댓돌위에 가지런히 모셨다. 방으로 들어와 벽에 기댄 채 구들온기에 잠이 들고 말았다. 소량의 잠마저 털어내듯 혼곤하게 잠의 늪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아마도 명신암의 주지인 명신도 잠결에 다녀가는 것을 보았다. 더 자라며, 너울너
시체(10)골짜기로 접어든 타심은 서둘러동굴로 찾아갔다. 동굴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화목하게 이야기꽃을피우고 있었다. 틀림없이 도와준다는 확신으로 타심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약간의 망설임은 없지 않았지만 남자는 오랑캐를소탕하고자하는 구국일념에는 앞장서고 싶다고 했다.우리는 머리를 모았다. 많은 머릿수로 위협을 주기위해 곳곳에 허수아비로 위장하는 것이 첫째요. 양쪽의 곡벽이 급경사를 이룬, 폭이 좁은 협곡으로 몰아넣는 것이 둘째요.억새풀이 흐드러지는 구석진 곳으로 그들을 모았다 싶으면 남동풍에실은 화력을 당기는 것이 셋째
시체(7)곡괭이와 삽으로 다져진 근육을 여지없이 드러낸 남자가 여자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수풀더미가 쿨렁거렸다. 타심은 바위 뒤에 몸을 낮추어 말로만 듣던 남녀의 짝짓기를 비로소 목도하게 되었다. 저 휘몰아치는 거침없음을 받아들이는 여자의 표정은 행복해보였다. 여자의 목덜미와 가슴과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온통 사타구니로 빨려 들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타심은 여자의 성기를 처음 보았다. 거머리의 빨판을 닮아있었다. 타심은 뜨거운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행동이 수도승으로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시체(5)타심은 낭떠러지 끝에서 아래를 쳐다봤다. 들쑥날쑥 솟아오른 바위틈 사이로 이미 백골이 되었거나 뒤엉킨 채로 썩어 들어가는 아비규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놀랍도록 연고가 없는 흉물스런 시체들을 이곳으로 죄다 버린 모양이었다. 까마귀와 늑대와 멧돼지가 들끓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사방팔방에 퍼져있는 악취의 진동도 쉽게 이해가되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죽음으로 뜨겁게 널브러져있는 모습을 아이들도 봤을 게다. 응당 골짜기가 주는 창궐의 기운을 느낀 아이들에게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시체(4)타심은 쇠스랑과 도끼가 구석으로 밀려나 통증을 호소하는 것을 경계를 풀지 않는 채로 쳐다보았다.정수리를 감싸고 쩔쩔매는 쇠스랑과 목울대의 고통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도끼에게 연민을 느끼기에는, 수도승으로 떠돈 세월이 만만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상대의 방심과 허점을 이용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해오던 약육강식의 생리를 몸소 체득하고 있었다. 나라는 온통 기근에시달렸고 때맞춰 변방에서부터 오랑캐의 침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독기를 품은 듯 스스로가생사에 책임을 져야할 곤궁으로 내몰렸다. 죽일 각오로 덤벼드는 상대와 맞서려
시체(4)도적들의 움직임은 빨랐다. 배가 고파서 뛰쳐나온 생계형 도적들은 분명 아니었다. 무기를 다루는 움직이라든지 승냥이 같은 눈매에서 이미 살기가 듬뿍 실려 있었다. 신분노출을 자제하던 두건을 도적들은 벗었다. 긴장한 탓인지 타심의 뒷목이 꼿꼿하게 서는 두려움을 느꼈다. “두건을 벗고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겠지? 한 놈도 살려두지 않고 동굴 안을 무덤으로 만들어 줄 작정이야. 어린놈의 목숨이 아깝지만 이 또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면 그나마 편하지.”쇠스랑을 쥔 도적이 앞으로 나섰다. 탄탄한 어깨근육이 대충 실
거머리(9) 아낙들의 해방감은 여지없이 빨 래터에서 드러났다.눈치를 보거나 주눅들 이유가 없는 고만한 끼리끼 리 모여 있었다. 손으로는 빨래방망 이를 두드리고 뗏국물을 빼며 제 할 일을 하면서 입으로는 온갖 말을 쏟 아내었다. 타심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두 가지 일을 능수능란하 게 해치우는 아낙들이야 말로 진정 한 고수였다.깔개에 펑퍼짐하게 앉 거나 쪼그리고 앉아 세상의 근심걱 정과 살을 붙인 소문들을 양성하는 본거지가 빨래터인 것만큼은 분명 했다.속살을 감추는 고쟁이가 훤히 드러나도 아랑곳없이 추임새와 감 탄사를 연발하고 있
12월 초 좋은 분들과 함께 52년 전 살았던 옥정동을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산골마을에 살았던 나의 가슴은 부풀고 들뜬 가슴은 설레임으로 충만했습니다. 9월 초부터 매주 토요일 오전 영천시 인성교육관으로 가서 지인들과 함께 ㈜영천인터넷뉴스 부설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김정식 초대원장님의 흥미진진한 강의를 들었습니다.코로나19의 장기화로 어려운 가운데 나는 개인적으로 원장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송계 한덕련 선생의 스토리텔링 이야기로 만나는 송계라는 소중한 책도 선물로 받았으며 책 저자의 직강을 듣는 귀한 시간이
시체(2)사슴의 저항은 만만하지 않았다. 목덜미를 안간힘으로 붙들고 있는 남자의 악력은 의외로 저항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쇄골이 드러난 남자의 어깨는 앙상하게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어떻게 할지 몰라 어정쩡한 자신의 모습에서 타심은 한편으로 못내 속상했다. 살생을 금지하는 교리를 받들고 있는 수행자로서 도리는 아니지만 사실 도와주고 싶었다. 얼음위에서 사슴의 발악은 네다리를 묶어놓았을 뿐 몸뚱이는 심하게 곤두박질쳤다. 남자가 지탱하는 힘이 바닥을 보일 때쯤 여자와 아이들이 얼음판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여자는 요동치는 사슴
시체(1)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태종 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했다. 물론 그전부터 수많은 침략으로 야욕의 승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외세확장을 꾀하게 되면 늘 조선은 과녁이 되었다. 그만큼 만만하다 못해 속국으로 여기기까지 했으니 오죽했으랴. 침략으로 약탈, 방화, 살육, 겁탈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기본적인 방어에 급급했고 선제공격은 언감생심 생각지도 못했다. 흉년으로 제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했고 먹을거리 입을 거리에 매달려야 했다. 청나라든 명나라든 여진족이든 백성들은 하나로 지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