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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한 관 식 작가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3.2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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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포켓(21)
표현봉은 작업대에 집게로 고정한 4절 켄트지위에 컴퍼스와 삼각자를 올려두고 4B연필을 손에 쥐었다. 이제껏 보지 못한 색다른 방법의 접근이라서 내심 기대가 되었다. 언제부턴가 학생모드로 돌아선 자신의 마음가짐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칫 무료해지거나 태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배우고자하는 열정이라 생각했다. 간신히 빠져나왔다고 생각되는 은둔형 외톨이에서 잠재적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피폐한 삶에 갇혔던 과거청산을 위해서라도 가일층 세상과 어우러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열린 마음에서 그 해답을 찾을 것이다. 
“요즘은 그리고자하는 외형보다 감정의 내부를 찾는 것을 중시하여 뎃생의 골격을 방해하는 요소로 심심찮게 작용하는데, 난 오늘 초보자의 시선에서 사물의 형체에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를 할 생각이야. 백호군의 눈높이에 닿아있기 때문에 한결 받아들이기 쉽겠지?”
밝은 봄 햇살이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애써 지우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어젯밤 자살한 여자의 실루엣이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표현봉의 뎃상에 집중하려고 도리질을 하면서 창문을 등졌지만 자꾸만 고개를 돌려 눈길이 가고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한 사십대 중반의 여자얼굴은 알 수 없지만, 죽기직전 마주친 눈빛만큼은 내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하나가 인두로 지져진 채 똬리를 튼 모습으로 내속에 새겨져 버렸다. 
“먼저 점, 선, 면을 상호 접속관계의 테두리에서 한 편으로 만들어버리면 자연스럽게 모형으로 바톤터치가 가능해지지. 모형은 조각의 덩어리를 붙이는 작업이야. 듣고 있나? 왜, 반응이 뜨뜻미지근한가?”
순간적으로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온 듯 차렷 자세로 크게 대답하고 말았다. 
“맞습니다!”
“뭐가? 뜨뜻미지근한 것이 맞다는 건가?”
“아, 아니... 교수님의 가르침이 맞다는 겁니다.”
“집중! 집중!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집에 놔둔 꿀단지도 좋지만 꿀을 생산할 꿀벌 채집이 절실할 나이라는 것을 명심해.”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현관문 곁에서 음악다방 마담이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화끈거렸지만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표현봉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테두리 악센트에 접근하다보면 밝은 부분이라 해서 완전히 밝을 수는 없지 않는가. 밝지만 어두운 부분에 대한 터치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 디테일이 살아나면서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지.”
이번에는 마담의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표현봉은 자신의 표현에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웃사촌도 왔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자네 나이 때 나 같은 스승을 만났더라면 훨씬 장족의 발전을 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백호군?” 
표현봉식 유머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가끔씩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이웃사촌과 시간이 필요할 때야. 정리정돈은 내일하고 퇴근해.”
가급적 빠르게 작업실에서 빠져나왔다. 요 며칠 거른, 서화인을 향한 돌격 자세로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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