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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임하 내앞마을

양 삼 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불교문화대학원 교수풍수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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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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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임하면 진천리에 가면 내앞마을이 있다. 이곳은 이중환의 『택리지』와 훗날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풍수』에서도 경주의 양동마을과 풍산의 하회마을, 그리고 봉화의 닭실마을과 더불어 삼남(三南)의 4대 길지로 꼽은 마을이다. 여기서 삼남이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한양 남쪽의 세 지역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 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으로 5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곳이고 내앞이라는 지명은 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 앞의 마을이란 뜻이다. 특히 이 마을은 독립운동사의 성지라 불릴 만큼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으로 경북독립기념관이 마을 앞에 자리하고 있다. 그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이 100여 가구 1천여 명에 달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만주벌호랑이’로 불린 김동삼과 해방직후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 문중단위로 망명길에 오른 김대락도 이 마을 출신이다. 
내앞마을의 의성김씨는 안동 밤적골에 살던 김만근이 해주 오씨와 결혼한 후 처가살이를 하면서 시작하였다.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종택은 김만근의 아들 김예범이 70여간 생활하면서 종가로서 위용을 갖추었고 김예범의 뒤를 청계공 김진(金璡)이 이으면서 의성김씨는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청계공은 슬하에 아들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귀봉 김수일 (龜峯 金守一),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남악 김복일(南岳 金復一) 오형제를 두었으며, 이들 형제 모두 퇴계선생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고 그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들 형제 중 세 형제는 대과인 문과에 오르고, 두 형제는 소과인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이런 일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예로 사람들은 종가의 택호를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렀고 청계공도 사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기에 육부자등과지처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아들들을 다섯 마리 용에 비유해서 오룡지가로 부르기도 했으며 넷째 김성일은 후일 서애 류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했다.
이와 같이 내앞마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대종택은 유명한 양택발복지이고 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의 모래 탑 경관이 밝은 달빛 아래에 비단을 빨아 널어놓은 것과 같다하여 이 마을을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이라 부른다. 그러나 양택입지의 필수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조건은 갖추었으나 마을 입구가 좁고 안쪽이 후덕한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조건은 갖추지 못하였기에 마을 안쪽의 생기가 그대로 빠져나갈 수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마을 앞을 흐르는 반변천의 수구가 너무 넓어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보고 마을 서쪽에 수구막이 인공섬을 만들고 그곳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것은 마을 앞의 안산이 보기에 흉하다하여 마을에서 쉽게 보이지 않게 하고, 수구를 좁게 하여 마을의 생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비보(裨補) 섬(숲)이다. 이러한 명가 대종택과 완사명월형의 풍수적 길지에 자리 잡은 의성김씨는 조선시대 대소과 합격자가 무려 100여명에 달하고 문집을 남긴 인물이 90여명에 이를 정도로 문명이 높은 명문가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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